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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22. 22世 〉24. <부정공>성재처사휘낙모(연성)묘갈명(省齋處士諱樂模(淵性)墓碣銘)
1. 문헌 목록 〉22. 22世 〉26. <부정공>겸암공휘정환(연승)행록(謙菴公諱正煥(淵承)行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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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부정공>묵암공휘기환(연철)행장(黙菴公諱淇煥(淵徹)行狀)
黙菴公諱淇煥行狀 公諱淇煥字賛明號黙菴世居順天爲南中望族玉川府院君諱元吉謚忠獻爲中祖生諱瑜副正我 朝累徵以大官終不起生節度使諱崇文謚節愍生敎官諱哲山 端廟丙子六臣之禍父與子同殉節連世蔭文科官字撫郡縣至曾祖諱鎭龍號湛軒廣施恩義有四面春風之頌祖諱善浩號述菴考諱秉斗號龜亭妣全義李氏熙燮女文貞公鎭儀后也 高宗癸未十二月二十二日生公于龜山第賦性異凡自齠齡能知愛親敬長之道不與群兒遊戯甞以十世前失怙未及養爲終身之痛事母夫人極盡誠敬左右承順一無違忤事叔父如嚴父事無大少必禀命而後行與弟及群從昆季友愛尤篤就師讀書不煩程督窮研意趣或有未曉處必就師問難不知不措年十四五頗有文名常以九容九思自警其身言笑動止不苟不妄出遊見兩兒相鬪呼其父母名而辱之公峻責曰父母至尊不可對也聞者嘆服家間什物通用無間小無難色積舊產業漸次削弱而賙宗族恤鄉隣接賓客之道小無欠節一遵先規湛軒四面春風之頌至今復新焉歲丙寅母夫人以隆老之疾膳度漸損累月呻吟委席不起公心焦面黑湯藥煎粥甞糞禱神調養之方無所不至竟以命終公號母接顔哀號徹天願言侍歸自母胸間有爆竹聲翻然回甦以手撫背曰我死命也汝死非孝也因復殞絶丁卯正月二十五日人皆謂孝誠所感死母復甦也其擗踊哭泣淚盡繼血絶食四五日既葬餟粥居哀成疾猶不脱首腰經不進酒肉薑桂之類省墓拜哭課晨往來不避風雨三年一如還家則不移靈下無霽漏之時一至終制而極其誠孝鄉黨僚友感賞其孝行德義自鄉道褒薦之文及其祭也沐浴齋戒思其所嗜必供雉腊而親自檢飭於烹飪之節以致其如在之誠其燕居也以庸學心經近思錄及我東諸賢言行雜錄日夕輪誦爲一生省察之方切不喜時人褒獎之類都市隔在數弓而一不接足行儉慈惠世所服心矣自韓末以來反覆非一甲午東亂戊申己酉義亂庚寅叛亂二次大變村虛門滅比比有之而惟公家大小無一次受楚無慮自如家廟享之子孫保之此公之種善施恩深得鄉坊之歡心而非亘後進也歟日以輪感神氣不平累日呻吟子與孫之調度殫碣孝誠無奈天年溘然而逝丁亥十一月十六日享年六十五葬于龜山村後麓坤坐原齊星州李氏榮淳女文景公稷后壬午生資性賢淑敬承君子育三男二女男長休警次休照次休三女長昌原黃鎬峻次南原尹在述休警生一男三女男昇勲女平澤林錫煥南平文性敏次幼休照生四男三女長良勲次熺勲次景勲次龍勲女長潘南朴某餘幼休三生三男二女男長整容次漢容次聖容女皆幼顧此積善餘慶雲仍繼承榮譽不絶明明天理福善禍惡於此可證也子休警甫携其先考行錄若干及鄉道褒薦文來而屬余爲文辭之不得略採其褒彰狀中大槩抄強如右以俟立言君子之考詳焉 歲彊圍作噩春三月戊申 族從 淵冲 謹撰 묵암공휘기환행장(黙菴公諱淇煥行狀) 공의 휘는 기환이요, 자는 찬명(賛明)이며 호는 묵암인데 대대로 순천에 살아 남중 망족이 되었다. 옥천부원군 휘 원길(元吉)의 시호는 충헌인데 중조요, 생휘 유(瑜)는 부정으로 이조에서 큰 벼슬로서 여러번 불러도 마침내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며 생 절민공 휘숭문(崇文) 생 교관 휘 철산(哲山)은 세조 병자년 때 육신의 화에 부자가 함께 순절하고 대를 이어 음보로 문과에 벼슬하여 고을을 다스리니 백성들이 덕을 기리었다. 증조 휘 진용(鎭龍)의 호는 담헌인데 널리 은의를 베풀어 사면춘풍의 송가가 있었고 조 휘 선호(善浩)의 호는 술암(述菴)이요, 고의 휘는 병두(秉斗)인데 호는 귀정이며, 비는 전의 이씨(全義李氏) 희섭(熙燮)의 따님으로 문정공 진의 후예이다. 고종(高宗) 계미년(癸未年一八八三) 十二월 二十二일 귀산 본가에서 공은 출생하였는데, 천부한 성품이 보통사람과 달라 七·八세 때부터 능히 어버이를 사랑하고 어른을 공경할 도리를 알며 웃아이와 함께 놀며 장난을 하지 아니하고 일찌기 十세 전에 아버지를 잃고 봉양하지 못한 것을 종신토록 슬픔으로 삼고 모부인을 섬기매 지극히 정성과 공경을 다하여 좌우로 순하게 받들고 한번도 어김이 없으며 숙부를 아버지 같이 섬겨 일의 대소가 없이 반드시 고한 뒤에 행하고 아우 및 여러 종형제와 더불어 우애가 더욱 두터웠다. 스승에게 나아가 글을 읽으며 번거롭게 정독아니 하여도 뜻을 다 연구하고 혹 깨닫지 못한 곳이 있으면 반드시 스승에게 나아가 어려운 것을 물어 알지 못하면 책을 놓지 아니하였다. 十四, 十五세에 자못 문명(文名)이 있어 항상 구사(九思), 구용(九容)으로써 스스로 자신을 경계하고 말과 웃음이며 움직이고 그치기를 구차하고 망령되지 않게 하였다. 한번은 나가 놀다가 두 아이가 서로 그 부모를 욕하며 다투니 공이 준절히 꾸짖어 말하기를, 「부모는 지극히 높은지라 맞대어 말할 수 없다」하니 듣는 자들이 탄복하였다. 집안에 세간을 사이 없이 통용하고 조금도 어렵게 여기는 빛이 없으며 오래된 살림이 점차 축이 나도 종족을 구제하고 향인을 진휼하며 손님을 접대한 도리는 조금도 흠절이 없고 한결같이 선세의 규율을 따르니 사면춘풍의 송가가 지금 다시 새로왔다. 병인년(丙寅年)에 모부인이 노병으로 식사를 점차 적게 들고 여러달 신음하다가 자리에 누워 일어나지 못하니 공이 마음이 타고 낯이 검어 약을 다리고 죽을 끓이며 똥을 맛보고 귀신에게 빌며 갖가지로 봉양한 길이 이르지 아니한 바 없으나 마침내 천명으로 돌아가시니 공이 어머니를 부르며 낯을 대고 하늘에 사무치도록 슬피 부르짖으며 모시고 돌아가기를 원하니, 어머니의 가슴으로부터 대 마디가 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문득 회생하여 손으로 등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나 죽는 것은 명이요, 너 죽는 것은 효도가 아니니라」 하고는 인하여 다시 운명하니 정묘년(丁卯年一九二七) 一월 二十五일이요, 사람이 다 효성에 감동하여 죽은 어머니가 갱생하였다고 말하였다. 그 가슴을 두드리고 뛰며 눈물이 다하여 피가 되고 四, 五일 식음을 전폐하며 장사 후에 죽을 먹으며 거상중에 병이 나도 오히려 絰帶를 벗지 아니하고 술과 고기를 먹지 아니하며 성묘 때에 배곡하며 새벽에 왕래하되 풍우를 피하지 않고 三년을 하루같이 하고 집에 돌아오면 영위를 떠나지 않고 종제하여 그 성효를 다하니 향당 요우가 그 효행과 덕의에 감동하여 고을과 도로부터 포천문이 있었다. 제삿날이 되면 목욕 재계하고 그 즐겨한 바를 생각하여 반드시 꿩포를 쓰고 친히 제수 숙정을 보살피며 계신 것 같이 정성을 다하였다. 편안히 쉴 때는 각종 서책을 주야로 돌려가며 외우고 일생을 내 몸을 살피며 절대로 세속 포장을 좋아하지 아니하고 시장가에 투족하지 아니하였으며 검소하고 자혜로우니 세상 사람이 감복하였다. 한말(韓末)이래로 반복이 비상하여 갑오동란 무신의병 경인반란 등 삼차 큰 변란에 터가 비고 집안이 망한 사례가 종종 있었으나 공의 대소가는 안온하여 사당이 무사하고 자손이 안보 하였으니 이것이 공이 덕을 심은 報施가 아니겠는가. 하루는 감기로 심기가 불편하여 신음하더니 자손의 치성도 효과없이 정해년(丁亥年一九四七) 十一월 十六일에 향년 六十五세로 별세하매 九山村 後麓 坤坐原에 장사하였다. 부인은 성주 이씨(星州李氏) 영순(榮淳)의 따님으로 문경공 직(稷)의 후손이며 임오년(壬午年) 생인데 성품이 현숙하여 군자를 경대하였다. 아들은 휴경(休警), 휴조(休照), 휴삼(休三)이요, 딸은 창원(昌原) 황호준(黃鎬峻) 남원(南原) 윤재술(尹在述)의 처며 손자 승훈(昇勲)과 평택(平澤) 임석환(林錫煥), 남평(南平) 문성민(文性敏)의 처는 큰 아들 소생이요, 양훈(良勲), 희훈(熺勲), 경훈(景勲), 용훈(龍勲)은 둘째아들 소생이요, 정용(整容), 한용(漢容), 성용(聖容)은 막내아들 소생이다. 돌아보건대 적선 여경으로 자손이 진진하고 영예가 불절하니 밝은 하늘 이치와 복선 화악을 이에 가히 증거하겠도다. 아들 휴경씨가 그 선고 행록과 향도 포천문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문자를 부탁하므로 사절하다가 부득이하여 대략 표창장 가운데 대강을 찾아 위와 같이 초하여 군자의 상고를 기다리기로 한다. 族從 淵冲 삼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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